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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레이디

미스터리,추리 김성준

거대 제약 회사의 은밀한 제안을 받은 '나'. 수상한 임상 실험을 경험할 때마다 잊고 싶었던 '그녀'가 꿈에서 등장하는데...

작품소개

오늘도 지옥철에 몸을 맡기는 평범한 30대 기자, 찬호. 찬호는 자신에게 접근한 거대 제약 회사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영원히 쾌락이 곁들어진 '꿈'을 만들어줄 약을 먹게 된다. '찬호'는 자신을 둘러싼 음모를 역으로 이용하려 들지만, 이 소용돌이에서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다. 그도, 그 약효 안에 머물고 싶어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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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로그라인]
신약을 통해 밤마다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지만, 그 욕망은 파멸의 덫이 된다.

[기승전결-기]
‘나’는 박봉을 받으며 영세 인터넷 신문사에 다니는 기자다. E&L그룹의 박영수 차장이 나타나고부터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기승전결-승]
박영수 차장과의 만남은 그가 쳐놓은 덫이지만, ‘나’에게는 큰 기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욕망 앞에서 무릎을 꿇는 ‘나’는 인생을 더 시궁창으로 끌고 간다.

[기승전결-전]
‘나’는 박영수 차장을 통해 사라진 여자친구, 안세이의 비밀을 점점 벗겨가지만,
그 진실에 접근할수록 D&L그룹 회장의 괴기스러운 정체 역시 점점 윤곽을 드러낸다.
‘나’는 박영수 차장과의 악연을 알고 복수를 꿈꾸지만, 그런 거창한 일은 ‘나’가 아닌 D&L그룹 회장의 몫이다.
회장 역시 박영수 차장에게 앙갚음 할 게 있었던 것.

[기승전결-결]
회장은 ‘나’에게 우연찮게 마지막 남은 알약이 한 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를 쫓게 된다.
‘나’는 회장으로부터 감당하기 힘든 거래조건을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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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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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속으로

환자는 약을 먹고 잠듦으로써 아무런 고통 없이 비참함에서 벗어난다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
비 그친 호수에 핏물이 일렁였다. 열방의 노예가 파놓은 호수는 붉은 해거름마다 핏물이 된다.
황제는 서른 자 깊이로 파인 구덩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근위병들은 노예들을 몽땅 그 안에 밀어 넣고 땅을 덮어버렸다.
더 먼 데서 끌려온 노예들이 거대한 토분 옆에 아흔아홉 자 깊이로 다시 땅을 팠다. 비가 오는 날에 호수는 죽은 노예의 노래를 불렀다.
7년째 가물었다. 황제는 신민이 물을 마시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바람이 뜨는 물수제비가 만조처럼 꽉 찬 핏물 위로 선을 그었다.
호수 둘레에는 수만 리 밖 남국에서 날라 오는 황금빛 과일 같은 등이 켜졌다. 신민들은 그것이 노예의 기름으로 켜는 등불이라 했다.
코끼리 상아로 만든 호롱에 불빛이 휘우듬히 흔들거렸다. 제국의 지도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도 맥없이 너울거렸다.
금실로 짜놓은 지도가 시커멓게 변했고, 차갑게 식어버린 화로에서는 재가 흩날렸다. 늙은 내관은 조심스레 쿨럭쿨럭 재채기를 했다.
황제는 밀랍이 벗겨지지 않은 두루마리들을 던졌다. 늙은 내관은 두루마리들을 가슴팍에 안고는 하나씩 읽었다.
고산의 산성에 숨어 달포를 버티던 북쪽의 왕은 패잔병들의 손에 목이 잘려나갔습니다.
남쪽의 소국들이 수코끼리 오백 마리와 미녀 이천 명을 바칠 테니 조공을 허가해달라는 청입니다.
서쪽의 왕은 계절마다 공물을 바칠 테니 제국의 군대가 성을 공격하지 말아달라는 간청입니다.
늙은 내관은 다음 두루마리를 읽지 못했다. 그는 황제 앞에서 기절한 죄로 투옥됐고, 젊은 내관이 그 두루마리를 집어 펼쳤다.
두루마리는 제국의 몰락을 전하고 있었다.
황제는 머뭇거리는 젊은 내관을 노려봤다. 내관은 자살을 선언하듯 울먹이며 읽어나갔다.
병환 깊으시던 공주께서…….
분노한 황제는 왕홀로 내관의 눈을 찔렀다. 젊은 내관의 얼굴을 처음 들여다본 황제는 두려워 몸서리쳤다.
내관은 황제와 똑같이 생겼던 것이다. 황제는 이것이 역적의 음모라 생각하고는 호위무사를 불렀다.
무사 대신 들어온 자는 황제의 후계자였다. 황태자는 망설임 없이 아비의 옆구리를 도끼로 찍었다.
영원히 살고 싶었던 황제는 핏물이 일렁이는 눈으로 아들을 노려봤다. 황제는 그때서야 발견했다.
아들이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는 걸. 닮은 것이 아니라 완벽히 똑같이 생겼다는 걸. 황제와 아들과 내관은 세쌍둥이처럼 얼굴이 똑같았다.
그때, 제국이 모서리부터 붕괴되는 소리가 들렸다. 제국은 천천히 접히는 두루마리 지도처럼 끝자락부터 조금씩 말리고 접히고 무너졌다.
마침내 황궁도 사라지고 황제의 침실도 어두움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런 것이 삶이더냐! 황제는 ‘이번’ 생을 저주했다.



*
어휴, 사는 게 뭐 이러나 모르겠다.
출근 지하철 기다리며 봐야하는 광고부터 구역질났다. 추악한 D&L그룹 회장이 뻔뻔스레 웃고 있었다.
광고에는 <희귀병 임상시험 대상자 모집. 일체 비용 없음. 소정의 사례금 드림>이라고 적혀 있었다.
얼마나 중요한 약을 만들기에 말더듬이 회장이 직접 모델로 나설까 싶어 의아했다.
나는 의약전문지 기자이지만 약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안다.
어떤 형편에 놓인 사람들이 저런 데 지원하는지, 그리고 저 늙은 흡혈귀가 그들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돈 없으면 몸 간수라도 잘해야 한다.
오늘도 지각이다. 지금이 8시 정각. 사장은 원래 9시인 출근시간을 30분 앞당겨 8시 30분까지 출근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그러라면 그래야 한다.
사장은 지각하는 걸 아주 싫어한다. 물론 나한테 월급 많이 주는 거랑 내가 회식자리에서 고기 많이 먹는 거랑 술 적게 마시는 것도 싫어하지만,
지각도 매우 싫어한다. 사장 말로는 1분 늦는 거나 1시간 늦는 거나 똑같단다.
교도소에 1년 있는 거나 10년 있는 거나 전과자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라면서. 사장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그러니까 지금 2호선을 타고 방배역을 지나는 나는 20분 내에 숙대입구역에 도착한 후
역에서 한참 떨어진 회사까지 치타처럼 뛰어야 한다. 당연히 목숨 걸고 무단횡단도 해야 한다. 지각을 면하려고 로드킬 당할 수도 있다.
싸구려 고추장처럼 검붉게 달아오를 사장 얼굴을 떠올리니 눈물이 핑 돌았다. 울고 싶었다.
사장은 요즘 ‘로봇 기자’에 관심이 많다. 감시할 필요 없이 알아서 기사를 쓴단다. 시간도 안 걸린다.
말 그대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보도자료를 받으면 그 즉시 기사가 떡하니 튀어나온다.
무엇보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월급 줄 필요가 없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뛰었다. 8시 28분. 쫓기는 현행범처럼 냅다 달리고, 위험천만하게 무단횡단도 했다.
주머니 속의 폰이 드르르르 괴롭게 몸부림을 쳤다. 아, 국장님 제발.
회사에 도착해보니 8시 34분. 4분이나 늦었다. 사장 사고방식대로라면 나는 전과 4범이 된 셈이다.
허수아비 국장은 아침부터 자리에서 졸고 있었다. 그는 내가 잠 깨우는 걸 가장 싫어한다. 나는 죄인답게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이 기자 왔어요?”
사장실 문에 노크를 하려는데 국장이 날 불렀다. 소심한 국장은 자식뻘 되는 내게 반말도 못 한다.
“사장님 안 계세요. 병원 가시는 날이잖아요. 그리고 점심때는 광고 때문에 제약사 사람들 만나신대요.”
가끔은 인생이 잘 풀리는 날도 있다.
“아, 그럼……?”
자리에 앉은 나는 두 눈에 하트를 그리면서 국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마 안 나오실 거예요. 그래도 우리 너무 방심하진 맙시다.”
키보드에 올려둔 내 검지가 ㅋ을 연속으로 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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