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신림동 고시촌, ‘해탈에 이르는 길’이라 불리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성문 고시원. 그곳에 사법고시 6수생 현우가 있다. 5년 연속 고배를 마신 끝에 이번 모의고사에서 겨우 합격선에 드나 했더니, 악덕 총무 안석주와 사사건건 부딪히던 어느 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벌어진 사건 때문에 총무로부터 ‘퇴실 명령서’를 받게 되는데…….
시놉시스
신림동 고시촌, ‘해탈에 이르는 길’이라 불리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성문 고시원. 그곳에 사법고시 6수생 현우가 있다. 5년 연속 고배를 마신 끝에 이번 모의고사에서 겨우 합격선에 드나 했더니, 악덕 총무 안석주와 사사건건 부딪히던 어느 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벌어진 사건 때문에 총무로부터 ‘퇴실 명령서’를 받게 되는데…….
한편, 얼마 전부터 고시촌에 검은색 쫄쫄이를 입고 노란 헬멧을 쓴 변태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돈다. 현우는 쫄쫄이 변태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고, 그를 잡기 위해 고시촌의 희망 전도사 미스터 앤서에게 그 정보를 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현우는 노란 헬멧을 쓰고 검은색 쫄쫄이를 입은 변태가 여성 전용 고시원 벽에 매달려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를 붙잡으려 한다. 그런데 변태 스토커라고 생각했던 그 남자, 어딘가 수상하다!
작가소개
[국어대사전]을 베고 잠드는 작가.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한숨 소리를 들으며 꿋꿋이 글을 썼다.
동네에서는 허풍쟁이 김뻥이라고 불리지만, 그 허풍이 모여 드디어 소설이 됐다.
제5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에서 《고시맨》으로 대상을 받았다.
작품속으로
1부 성문고시원
1. 해탈에 이르는 길
고시촌엔 공부하다 정신 줄을 놓아버린 광인의 수만큼이나 많은 언덕이 존재하는데, 오르기에 험난하기론 성문고시원으로 향하는 언덕이 가장 으뜸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언덕은 고시촌 사람들 사이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 이란 별칭으로 불렸습니다. 가파른 경사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어 무거운 책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수험생들에겐 도무지 오르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것은 한 여름엔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사구처럼 보이기도 하고, 길이 얼어버리는 겨울엔 날이 서 있는 빙산 같아 보였습니다.
해탈에 이르는 길이란 별칭은, 중국집 배달원들 사이에서 불리기 시작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배달원들은 성문고시원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댔습니다. 경사가 너무 심해 오토바이로 배달을 할 수 없는 지역인데다, 언덕 중간지점부턴 폭이 좁은 계단이 촘촘히 놓여있어 오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죠. 철가방이 기울어지지 않게 수평을 맞추면서 이곳을 오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길이 얼어 미끄럽기라도 한 날엔, 그 모습들이 거의 기예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생고생 할 거 뻔히 알면서 배달시키는 뻔뻔한 시키들. 저런 인정머리 없는 것들이 판검사 되겠다고 설쳐대니 나라가 이 모양이지.’
험지에 내몰린 그들의 입이 고울 리는 없었겠죠. 또한 짜장 반 짜증 반으로 퉁퉁 불어터진 면발이 맛있을 리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언덕 위로 짜장면을 배달시키는 고시생들의 수요는 좀처럼 줄지 않았지요. 이유는 간단한 것이었지요. 다들 언덕이 너무 높아 식사하러 내려가기가 더없이 귀찮았던 겁니다. 밥을 먹으면 뭘 합니까. 밥 먹고 다시 언덕을 오르면 이미 먹었던 것이 소화가 되는 걸.......
사람의 내장까지 푹 익혀 버릴 정도로 뜨겁던 여름 날, 그 날 하루 열여섯 차례 이 언덕을 왕복해야 했던 종업원이 있었는데, ‘해탈’ 이란 단어는 그의 입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합니다.
“철가방 안에서 꺼낸 단무지가, 갑자기 노란 황금 부처로 보이는 거야. 너무 놀라 단무지를 앞에 두고 삼배를 올렸지. 그 다음 순간, 난 해탈을 경험했어.”
폭이 좁아 더욱 가파르게 느껴지는 동네 주위에는 ‘서원’ ‘고시원’ ‘리빙텔’ ‘미니원룸’ ‘독서실’ ‘스터디룸’ 따위의 간판을 내건 벽돌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습니다. 띄엄띄엄 회색 전봇대가 박혀있고, 옆엔 그것들보다 더 오래되어 보이는 표정을 한 더벅머리 장수생이, 꼭 하나씩 그 밑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습니다. 가로 세로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전봇대 위의 전신줄들은 더벅머리 장수생의 머릿속만큼이나 복잡하게 엉켜 있습니다.
그 위에 줄 지어 나란히 앉아 있는 참새들, 아! 이 언덕 위엔 왜 이렇게 참새가 많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관악산자락이라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참새들을 노려보며 담장 위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길고양이 무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고양이들의 발정 난 울음소리가 수험생들의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기 때문에 어느 해에는 고양이 퇴치 운동이 벌어진 적도 있답니다. 그런데 나는 단 한 번도 덫에 걸려든 어리석은 고양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고시촌 고양이 3년이면 법전을 외울 법도 하거든요. 이곳의 고양이들은 도무지 사람조차 무서워하질 않습니다. 누군가 합격을 해 이 곳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공부가 고양이 잡는 것보다 쉬웠어요.’ 그리고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자신의 이름과 출신학교가 인쇄된 현수막으로 하늘을 가려놓은 뒤 떠나갔습니다. 합격자들은 항상 이렇게 흔적을 남겨두고 떠나갑니다. 그것들이 이곳저곳에서 빨래 감처럼 나부끼고 있어서 길은 더욱 어지러워 보입니다.
이 어지러운 길 끝에 성문고시원이 산 정상위의 망루처럼 우뚝 솟아있습니다. 언덕 아래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그것은 흡사, 혼탁한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 봉우리 위에 어느 돌팔이 중이 세워놓은 남근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내가 어머니와 함께 이 언덕을 처음 올랐을 때도 고양이 한마리가 길을 막고 누워 육구를 핥아대던 나른한 봄날이었습니다. 해는 이미 기울어가고 있었고 마음은 초조했습니다. 형편에 맞는 고시원 구하기가 이렇게 어려울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터라, 어머니는 몸보다 마음이 지쳐 있었습니다. 지대가 높으면 높을수록 원비가 싸다고 들었는데 직접 돌아다녀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고시원 정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이곳에서의 수험생활은 얼마나 힘들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묵묵히 어머니의 뒤를 따라 언덕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성문고시원 바로 옆에 붙어있는 구멍가게 아저씨가 가게 문을 열고서 우릴 불러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아주머니, 혹시 아들내미 고시원 방 구하세요?”
우리 곁에 다가온 그는, 마른 침만 삼키고 있던 어머니의 손을 꼬옥 잡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주머니, 아들내미가 사시 합격을 하려면 말이죠? 하늘이 도와야 하고 땅이 도와야 하고, 조상님이 도와야 하는 법이지요. 이 세 박자가 딱딱딱 맞아 떨어졌을 때,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는 법이라니까요.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지신이란 말이지요. 원래 이 자리에 조선시대 때 정승 하던 양반 생가가 있었다지요. 터 하나는 이 고시촌에서 최고 아니겠습니까.......우리 아들내미도 여기서 공부했는데, 합격해서 지금 연수원에 있지요. 여기가 조용해서 공부하기 제일 나아요.”
그는 결국 자기 아들 자랑 하기 위해 나선 것 인데,어머니는 ‘조선시대 정승 하던 양반 생가’ 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지셨나 봅니다. 갑자기 무릎을 치시며 “그렇지 그렇지. 발품 팔고 다닌 보람이 있었단 말이지” 라고 탄성을 지르시기 시작했죠. 얼굴이 상기된 어머니가, 고시원 석 달 원비를 내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인색한 아버지 몰래 그 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잘 알고 있는 터라, 나는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죠. 어머니는 내 옷깃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털어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현우아, 엄마가 딱 봐도 이 양반 말마따나 여그가 명당은 명당이다. 아까 밑에서 봉게 이 언덕이 꼭 붓 모양 마냥 이쁘게 빠졌어야. 고시원 이름에 ‘문’자가 들어간 것도 꼭 맘에 들고 말이다. 하이고야, 시장통 같은 저 밑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도 맘에 들고 말이지. 합격헐 때까지 여그서 기어 내려올 생각은 허덜 말어. 집 걱정은 말고. 알겄장?”
가파른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는 수고스러움 따윈, 어차피 한쪽 다리가 불편해 자주 움직이지 않는 나에겐 오히려 문제 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르내리기 쉽지 않아 더욱 엉덩이 붙이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비춰 보여 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날의 결정은 매우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훗날 밝혀진 바에 의하면 구멍가게 아저씨가 언급했던 조선시대에 정승 했던 양반이란 자는, 말년에 역적죄로 처형을 당한 불운의 사나이였으며, 고시원 터는 그자의 생가가 아닌 풀 한포기 자리지 않았다던 그자의 묫자리였다고 합니다. 그 자의 망령이 떠돌아다니는 모양인지 성문고시원에 자리 잡은 고시생들은 하나같이 악몽과 두통에 시달리곤 했지요. 악몽과 두통은 고시생이라면 누구나 달고 사는 것이니 고시원 탓으로 돌리기엔 무리라고 칩시다. 탓 할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성문고시원의 가장 끔찍한 점은 높은 언덕도 악몽도 두통도 아니었습니다. 고시원에 백년 묵은 능구렁이가 한 마리 살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땐 몰랐지요. 독을 품고 사는 능구렁이 안석주의 존재를 말입니다.